옷의 온도

옷이 되기 전의 풍경 

Part 4 캐시미어(Cashmere)


야생 산양이 남긴 첫 번째 흔적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던 무렵, 사람들은 거친 고산 지대에서 살아가던 야생 산양을 쉽게 길들이거나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대신 산양이 남긴 흔적을 찾아다녔습니다. 

마치 들판에서 이삭 줍기 하듯, 산양이 자주 지나는 길목의 바위나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털을 하나하나 거두어 모았습니다.

그렇게 모은 털은 실을 뽑아 직물을 짜기 전, 움집과 같은 원시적인 주거지에서 깔개와 덮개 같은 보온재로 쓰이며 혹독한 겨울을 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야생 산양의 흔적을 쫓고 무리의 이동 경로를 살피며 관리하던 경험은 산양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기르는 단계로 이어졌고, 마침내 야생 산양을 가축으로 기르는 길을 열었습니다. 

산양의 털을 안정적으로 얻을 수 있게 되자, 인류의 지혜도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늘어난 털을 더욱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가락바퀴'를 만들었고, 흩어져 있던 털은 마침내 한 올의 '실'이 되었습니다.

바람에 흩날리던 가벼운 털은, 어떻게 인류의 삶을 바꾸는 한 올의 실이 되었을까요?

 

1. 가장 차가운 곳에서 태어난 온기

눈 덮인 고원에서 겨울을 견디는 캐시미어 염소

산양들은 티베트고원과 라다크의 척박한 창탕(Changtang)고원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구름마저 쉬어 가는 해발 4,500m가 넘는 이 광활한 고원은 카슈미르(Kashmir) 인근까지 이어집니다. 캐시미어(Cashmere)의 이야기는 바로 이곳에서 시작됩니다.

오래전 이곳 사람들은 이 부드럽고 귀한 털을 파슴(Pashm)이라 불렀습니다.

수 세기 동안 실크로드를 따라 전해진 이 섬유는 카슈미르 장인들의 뛰어난 직조 기술과 만나 더욱 섬세하고 아름다운 직물로 완성되었습니다. 

18세기 후반, 유럽인들은 이 특별한 직물에 생산지의 이름을 붙여 캐시미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안개처럼 가볍고 구름의 촉감을 품은 캐시미어. 그 부드러움을 길러 내는 캐시미어 염소들의 삶의 터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높은 고원, 지구의 가장 거친 끝자락입니다. 

겨울이 오면 영하 40도의 칼바람이 대지를 휩쓸고, 바위마저 깎아낼 듯 눈보라가 몰아칩니다. 눈 덮인 고원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삼킨 채 깊은 침묵 속으로 잠겨 듭니다. 끝없이 펼쳐진 설원만이 그 고요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 깊은 고요는 모든 생명이 숨조차 얼어붙을 듯한 추위를 견디며, 대지가 봄을 기다리는 인내의 시간입니다. 가장 따뜻한 온기는 가장 차가운 곳에서 태어납니다. 캐시미어의 부드러움도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 긴 겨울이 지나 짧은 봄볕이 고원에 내려앉으면, 염소들은 대지가 새롭게 밀어 올린 어린 관목과 야생의 풀을 먹으며 다음 겨울을 견뎌낼 힘을 길러 갑니다.

고원의 추위가 남긴 흔적 위로 움트기 시작한 새싹은, 긴 겨울이 써 내려간 연둣빛 봄 이야기입니다.

대지와 식물, 그리고 염소들이 기대어 살아가는 순환 속에서 캐시미어는 고원의 시간을 머금고, 계절의 깊이만큼 부드러워집니다.

그 고원의 시간은 캐시미어 염소의 몸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쌓여 갑니다. 


2. 혹독한 겨울이 길러낸 부드러운 속털 

겨울이 깊어질수록 캐시미어 염소의 몸속에서는 비밀스러운 속털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매서운 추위로부터 체온을 지키기 위해, 거친 겉털 아래로 더없이 부드러운 속털이 여러 겹으로 채워집니다.

그 속털 한 올에는 아주 미세한 천연 주름, 크림프(Crimp)가 새겨져 있습니다.
양모의 크림프가 비교적 뚜렷한 물결을 이룬다면, 캐시미어의 크림프는 한층 완만하고 부드러운 곡선을 그립니다. 

이 곡선은 섬유 사이사이에 무수한 공기주머니를 만들고, 그 안에 데드 에어(Dead Air)라 불리는 정지된 공기를 가두어 둡니다. 캐시미어는 양모보다 섬유가 훨씬 가늘어 같은 무게로도 더욱 풍성한 공기층을 품게 됩니다. 

크림프의 곡선과 섬유의 가늘기, 이 두 가지가 어우러져 캐시미어는 같은 무게의 양모보다 최대 여덟 배 뛰어난 보온성을 발휘합니다.

가늘고 부드러운 곡선 속에는 차가운 계절을 견디기 위한 자연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그 덕분에 캐시미어의 감촉은 더없이 부드럽고, 뛰어난 흡습성과 통기성으로 습기는 흘려보내며 온기는 오래도록 붙잡아 둡니다.

캐시미어의 가벼움과 따뜻함, 그리고 부드러움과 견고함은 고원의 혹독한 계절이 길러낸 결과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부드러움이 애초에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추위를 견디고 살아남기 위해 자연이 완성한 생존의 방식이었습니다.


3. 고원의 온기가, 다시 자연으로

봄철 털갈이 시기, 캐시미어 염소의 속털을 빗으로 채취하는 전통적인 모습

매년 봄, 털갈이의 계절이 찾아오면 겨울을 함께 견뎌 낸 속털도 서서히 제 역할을 마칩니다. 더 이상 추위를 막아 줄 필요가 없어진 속털이 자연스럽게 빠져나올 때, 목동들은 결이 고운 빗으로 그 속털만 조심스럽게 빗어 모읍니다.

한 마리의 염소가 1년 동안 내어주는 캐시미어는 150g 남짓입니다. 여기에 섞인 거친 겉털을 정성스럽게 골라내고 나면, 비로소 목도리 한 장을 만들 수 있을 만큼의 순수한 속털만 남게 됩니다. 

그렇게 모인 가늘고 긴 섬유는 실이 되고 직물이 되어 마침내 한 벌의 캐시미어 옷으로 완성됩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코트와 스웨터 속에는 고원의 칼바람과 햇살, 대지의 풀과 초목, 그리고 목동의 시간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캐시미어 역시 자연에서 얻은 단백질 천연 섬유입니다. 그날이 되었을 때 잠시 빌렸던 자연의 품으로 고스란히 돌려보내면, 서서히 분해되어 다시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미생물의 먹이가 되어, 또 다른 생명의 자양분이 됩니다.

고원의 끝자락에서 시작된 캐시미어의 온기는 한 벌의 옷으로 우리 곁에 머물다 다시 대지로 돌아갑니다. 그것이 바로 자연이 이어 온 생명의 순환입니다.


다음 기록,
구름도 쉬어가는 고원을 지나, 다음 편에서는 뽕나무 숲에 숨겨진 비단(Silk)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오후 10시에 업데이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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